
혹시 갑자기 채소가 당긴 적 있으신가요? 이유도 없이 김치가 먹고 싶어지거나, 평소엔 잘 손이 가지 않던 나물 반찬이 유독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걸 그저 ‘몸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알게 된 사실 하나가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어쩌면 그 욕구의 주인이 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생태계가 살고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수는 약 38조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몸 안에 함께 살아가는 미생물의 수는 그보다 많은 약 39조 개에 달합니다. 이 미생물들의 집합을 마이크로바이오타(Microbiota)라고 하고, 여기에 각 미생물의 유전 정보까지 포함한 개념을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몸속 세균’이라는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입니다.
이 미생물들은 장에 가장 많이 분포하지만, 구강, 피부, 생식계 등 몸 전체에 존재합니다. 종류도 500종에서 1,000종 이상에 이르며, 그 구성은 사람마다 달라 쌍둥이조차 동일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이크로바이옴을 ‘제2의 지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실은 식이섬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식이섬유가 몸에 좋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사실 사람의 소화 효소로는 식이섬유를 직접 분해할 수 없습니다. 대신 장내 미생물이 이를 발효시키고, 그 과정에서 단쇄지방산(SCFA)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냅니다. 이 단쇄지방산은 장 점막을 보호하고, 염증을 줄이며, 전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식이섬유는 ‘내가 소화해서 흡수하는 영양소’라기보다, ‘내 장 속 미생물을 위한 먹이’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채소를 먹으라고 했던 이유가 단순한 비타민 섭취 차원이 아니라, 내 몸속 생태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 개념이 훨씬 실감 나게 다가왔습니다.
만약 이런 먹이가 부족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유익균은 줄어들고, 대신 단백질이나 지방을 분해하며 염증 유발 물질을 만드는 균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장내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마이크로바이옴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영역들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 비만, 당뇨, 지방간 등 대사 질환
- 우울증, 자폐 스펙트럼, 파킨슨병 등 신경계 질환
- 아토피, 심혈관 질환, 일부 암
- 약물의 효과와 부작용 반응 차이
아직 인과관계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유전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던 개인차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장과 뇌는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다
처음에는 ‘장내 미생물이 뇌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연결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장뇌축(Gut–Brain Axis)입니다. 장과 뇌가 신경과 화학 신호를 통해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연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미주신경(Vagus nerve)입니다. 뇌에서 장까지 이어지는 이 신경은 장의 상태를 뇌에 실시간으로 전달합니다. 장내 미생물이 만들어낸 대사 물질이 이 경로를 통해 신호로 전달되거나, 혈류를 통해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 역시 항생제를 오래 복용했을 때 이유 없이 예민해지고 소화가 불편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단순한 약 부작용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장내 생태계가 급격히 변한 영향이었을 가능성도 떠오릅니다.
이 분야에서 가장 극적인 치료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분변 미생물 이식(FMT)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을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식으로, 재발성 장 감염 질환에서 매우 높은 치료율을 보였고 실제로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례는 장내 미생물이 단순한 ‘보조 요소’가 아니라,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 연구 분야는 아직 비교적 초기 단계에 있으며, 많은 결과가 ‘연관성’을 보여주는 수준이라는 점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내 미생물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중요한 건강 변수가 하나 더 밝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균형 잡힌 시각일 것입니다.
식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이 내용을 접한 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식사를 바라보는 태도였습니다. 채소를 먹는 일이 ‘건강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에게 먹이를 주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치나 요거트 같은 발효 식품도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은 인식의 변화는 생각보다 큰 행동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억지로 식단을 관리하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선택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식이섬유나 발효 식품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